LIFE & CULTURE
HISTORY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동시에 건축과 기계 분야에 깊은 이해를 가진 과학기술자였다. 그가 고안해 수원 화성 축성에 사용한 거중기·녹로·유형거 등의 공구는 공사 기간을 대폭 단축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정약용과 그가 개발한 기계공구들에 대해 알아보자.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개혁가인 정약용(1762~1836)은 ‘목민심서(牧民心書)’와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집필한 실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단순히 행정과 법률을 넘어 과학기술, 공학, 기계 설계 영역에도 깊게 뻗어 있다. 조선 정조 치세의 개혁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그는 유학적 이상을 현실 행정과 기술로 풀어내려는 강한 문제의식을 지닌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특히 1794년, 수원화성 축성 총괄 실무에 참여하게 되면서 정약용은 단순한 학자를 넘어 공구를 고안해낸 기술자의 모습을 톡톡히 보여주었다.

화성 축조에서 잘 나타나는 정약용의 건축·도시 공학자로서의 면모를 살펴보면 정약용은 성을 쌓기 전 먼저 돌의 크기를 표준화했다. 축성에 필요한 석재의 크기를 큰 돌, 중간 돌, 작은 돌로 규격화해 돌을 부석소(浮石所, 돌 뜨는 곳. 오늘날의 채석장)에서 미리 다듬은 후, 이를 건축 현장으로 옮기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마치 요즘 공장에서 부품을 미리 만들어 운송한 뒤 현장에서 조립하는 ‘PC공법’처럼 말이다. 석재 크기의 표준화와 그가 개발한 공구들을 통해, 정약용은 축성에 필요한 운송비 절약은 물론 공사 기간을 대폭 단축시켰다. 당초 10년을 예상하던 수원 화성 축성을 채 1/3도 되지 않는 2년 9개월 만에 마무리한 것이다.

수원 화성의 축조는 단순한 방어용 성곽 건축이 아니었다. 화성은 정조의 정치적 이상과 백성에 대한 애민 사상이 담긴 계획도시이자 조선 후기 건축과 기술의 집약체였다. 화성은 전체 둘레 약 5.74km, 대형 석재와 목재가 정밀하게 배치된 과학적 성곽으로, 당대 조선 기술력의 총결산이었다. 그러나 이런 웅장한 건축물을 완공하려면 막대한 인력과 시간이 필요했고,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공사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중량물 운반과 적재에는 사고 위험도 컸다. 특히 성곽의 초석이나 누각의 기단부에 들어갈 수백 kg의 대형 석재를 옮기는 일은 가장 큰 난관이었다. 기존에는 수십 명의 인력이 줄을 잡고 맞춰야 했고, 조금만 삐끗하면 부상자도 속출했다. 이런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약용은 서양과 중국에서 들어온 과학기계서와 자연과학 원리를 연구했다. 그 결과 작은 힘으로도 효율적인 작업이 가능한, 건축 현장에서 직접 사용할 수 있는 기계 장치들을 설계했고 그것이 바로 ‘거중기·녹로·유형거’였다. 이는 노동력 절감과 안전 확보, 공사 속도 향상이라는 세 가지 효과를 동시에 가져왔다. 수원화성은 결국 이 발명 덕분에 예상보다 빠른 기간 내에 안전하게 완공될 수 있었고, 이러한 발명품들은 조선 기술사에서 보기 드문, 이론과 현장이 만난 과학적 성취로 평가받는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정약용이 고안한 세 가지 기계, 즉 거중기, 녹로, 유형거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축성에 필요한 노동력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➊ 거중기

거중기(擧重機)는 도르래와 지렛대의 원리를 결합한 공구로, 오늘날의 호이스트나 윈치에 가까운 역할을 했다. 기둥과 지지대를 세우고 도르래를 여러 개 연결해 줄을 잡아당기면 실제 무게의 절반 혹은 그 이하의 힘으로도 들 수 있어 2~3명의 인력으로 수백 kg의 초석을 들어올릴 수 있다.


➋ 녹로
녹로(轆轤)는 수직 방향으로 물건을 올리는 공구인데, 오늘날의 크레인과 비슷하다. 손잡이를 돌리면 줄이 감기며 석재 등의 자재가 상승하는 구조다. 성벽 위나 높은 누각으로 벽돌이나 모재 등의 자재를 올릴 때 필수적인 공구다.


➌ 유형거
유형거(有形車)는 대형 목재나 석재를 수평으로 운반하는 네 바퀴의 수레로, 바퀴와 플랫폼의 균형을 맞춰 대형 자재를 흔들림 없이 수평으로 운반할 수 있도록 설계된 이동식 장치다. 무게중심을 안정화한 균형 설계 덕에 흔들림 없이 자재를 운반할 수 있다.

정약용이 고안한 위의 세 공구는 각각의 역할이 분명했고 서로 보완적이었다. 거중기는 초석과 대형 석재 인양, 녹로는 벽체 자재의 상부 적재, 유형거는 창고에서 현장까지의 수송을 담당하며 공사 현장의 인력 동원 방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러한 기술적 활용은 단순한 도구 사용을 넘어서 건축과 물류 기술의 융합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선진적인 사례였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다양한 공구들은 어쩌면 조선의 한 실학자가 품었던 ‘작은 힘으로 큰 일을 해내는 기술’에 뿌리를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거중기와 녹로, 유형거의 도입은 단순한 노동력 절감을 넘어 건축 공법의 혁신을 이끌었다. 이전에는 수십 명이 필요했던 석재 인양을 2~4명이 가능하게 했고, 공사 속도를 단축하면서도 안전사고를 크게 줄였다. 실제로 수원화성 공사는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고 공사 기간 동안 큰 인명 피해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 기술 덕분에 화성은 2년 9개월 만에 완공되었으며 총 동원 인원도 기존 성곽 공사보다 30% 이상 절감되었다. 이는 단순한 도구 개선이 아니라 건축과 물류, 기계공학의 융합을 보여주는 조선 후기 기술혁신의 사례였다.
수원 화성의 축성 과정을 담은 『화성성역의궤』에는 “거중기 한 대를 세워 성문 초석을 들어올리니 평지에서 열 사람이 겨우 밀던 돌을 세 사람의 힘으로 끌어올려 자리 맞춤에 오차가 없었다.”라고 거중기의 사용 모습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화서문과 장안문, 정남루 등 대형 성문과 누각 건축에서의 공구 사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유형거의 경우 성 밖 창고에서 성곽까지 석재와 목재의 운반량이 기존의 3배 이상이라고 적혀 있기도 하다.

『기기도설』과 『기중도해』에는 정약용이 직접 설계한 거중기의 도면과 제작 방법까지 그림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복원된 모형을 보면 현대 크레인의 원리와 거의 동일하다는 점이 확인된다.


거중기·녹로·유형거 등을 고안해 낸 정약용. 정약용의 발명은 단순히 ‘기계를 만들어 낸 것’에 그치지 않는다. 노동의 효율화, 과학의 행정적 응용, 기술의 실용화라는 실학의 핵심 정신이 담겨져 있다. 이는 조선 후기의 실학이 단지 철학 담론에서 그치지 않고 현장의 생산과 건축, 조직과 노동에 적용될 수 있음을 증명한 사례다. 뿐만 아니라 거중기나 녹로 등의 발명은 훗날 크레인, 호이스트, 윈치 등 현대 공구의 원형으로 평가받는다.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가 도르래의 원리를 설명했다면, 조선의 정약용은 그것을 실제 건설 현장에 적용해 ‘과학 실용화의 본보기’를 남긴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의 융합형 인재 정약용. 그는 사상가를 넘어 조선이 낳은 최고의 과학기술자였다.


글 _이대훈 / 자료참고 _ 우리역사넷, 국가유산포털 외